제남학살, 일명 5·3학살, 일본의 제남사변(지난사변)은 국민혁명군이 도중에 산둥성 제남시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1928년 5월 3일 북벌에 나선 일본측은 혁명군을 핑계로 성내 일본군이 강도, 강간, 학살을 당했고, 보복을 위해 군대를 파견해 중국군 6000여 명을 고의적으로 학살했다. 사복. 이 가운데 국민당 현장사무위원회가 제남에 파견한 외사판공실 주임과 국민정부 외교부 산둥성 특사 등 외무성 간부 17명이 잔혹하게 살해됐다. 일본군. 참사 이후 일본측은 일본군이 중국군과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난징국민정부에 사과와 배상, 처벌을 요구하고 5월 11일 지난을 함락시켰다. 이듬해 3월, 난징 국민정부와 일본 정부가 '중일경제협정'을 체결한 뒤 일본군은 지난에서 철수했다.
1928년 5월 3일 저녁 23시쯤, 일본군은 산둥성 교섭소 앞에서 일본인 시체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뒤, 인원들의 총기를 강제로 수색했다. 협상실에 문의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당 외사판공실 주임이자 산둥성 교섭위원인 채공스(蔡孝師)와 사무국 직원 전원이 일본군에 묶여 얼굴과 귀, 코가 총검으로 잘려졌다. 차이 공시가 일본어로 항의한 후 그의 귀와 코가 잘리고 혀와 눈이 도려졌습니다. 일본군은 부서 직원들의 옷을 벗긴 뒤 채찍질하고 마당으로 끌고 가서 기관총으로 사살했다. 결국 채공시, 장린수 등 17명이 전원 사망하고, 부서 직원 1명만 탈출했다. (일부 연구에서는 당시 부서에 23명이 있었고, 6명이 탈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채공사가 살해된 후 장개석은 먼저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막고, 먼저 모든 군대에 충돌을 금지하라고 명령한 뒤, 북벌군에게 제남에서 철수하고 북벌을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우회. 한편 외교교섭을 통해 일본군 사령관과 일본 외무성에 각각 항의하고, 일본군이 진안에서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영국과 미국에도 중재 지원을 요청했다. . 그러나 일본은 이에 멈추지 않고 1만명이 넘는 병력을 일본에서 산둥성으로 계속 파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