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 12, 장립민, 아내 정레화 등이 강성으로 돌아와 한 달 넘게 머물렀다. 당시 조카 장자정은 그에게 책을 읽으라고 청했다. 장은 조용히 아들에게 네 권의 책을 읽고 말하도록 가르쳤고, 그가 외울 때까지 열심히 읽으라고 했다. 논어' 에서' 항상 배우다' 라는 말을 하면 1 월에' 배우다' 라는 글자만 말했다. 장은 연설 원고를 쓰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경전을 인용하여, 마치 수가진처럼 말한다. 그중 한유의' 석학' 과' 사설' 을 인용해' 스승, 그래서 가르치고 의혹을 풀다' 라는 말을 강조하며 사도의 장엄함을 보여 주었다. 자수정 본명 장욱, 장립민 씨는 그에게 개별적인' 자수정' 을 지어 주었는데, 이는 조용하고, 학문적이고, 말을 잘 듣는 것을 의미한다. 장립민은 또한' 자수정자' 를 써서 종이 열 줄, 손서 두 페이지를 썼다. 글씨가 단아하고 아름답다. 마치 예술품과 같다. 장립민은 사서의 본문을 암기할 뿐만 아니라, 주대 사서명에 대한 주석도 익혔다. 한번은 내가 코코 리 씨를 만났는데, 그는 접근하기 쉽고 대화하기 쉽다. 이름을 묻다. "안산" 이라고 대답하자, 코코 리 씨는 즉시 "잘 지내세요, 기쁘게 경례합니다." 라고 말했다. 나중에, 나는 주씨의 네 권의 책에 대한 주석을 축 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담화를 통해 나의 학우들은 코코 리 선생의 해박한 지식을 진심으로 탄복했다.
장립민사는 저명한 학자로부터 교육과 연구에 힘쓰고 있다.
장립민이 북경대학에서 공부할 때, 저명한 학자 웅십력과 마일포는 그의 선생님이었다. 웅십력은 경학과 불학 연구에 힘쓰며 박학의 거장으로 불린다. 마일부는 만청에서 매우 유명하다. 항전 시기에 진립부는 선생님을 찾고 싶었는데, 어떤 사람이 마일부를 추천했다. 1939 년, 진연마는 쓰촨 낙산에 가서 복성학원을 운영하고, 마임원장, 장립민이 선생님을 맡고 있다. 장립민은 현재 낙산 오룡사 은비둘기 별장에 거주하며 철학과 역사 교수와 연구에 종사한다. 1945 항전이 승리한 후 서원을 이름을 바꿔 항주로 옮겼고, 장은 계속 서원에서 교편을 바꾸었다. 1949 해방 후, 판자년은 장립민을 중원대 역사학과에서 교편을 잡고 화중사범대학으로 전입해 교편을 잡았다.